셰인 마이클 헤일리
버킷 리스트 아기
2014년 10월 9일, 첫째인 셰인 마이클 헤일리가 태어났다. 셰인은 비록 4시간 밖에 살지 못했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100년 안에도 이뤄내지 못할 자취를 남기고 떠나갔다.
2014년 3월 30일, 우리 부부는 펜실베니아 주립대에서 야구선수로 활약 중인 시동생을 방문한 뒤 차를 타고 집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속도로가 꽁꽁 얼어 붙은 탓에 우리 차가 그만 55 mph 속도로 미끄러지면서 가이드레일과 중앙분리대에 2차례나
부칮히고 말았다. 천만 다행이도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나는 임신 12주였기 때문에 혹시나 태아에게 이상이 있지 않을까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는 초음파검사 결과는 괜찮지만 혈액검사 결과 태아출혈이 감지된다며 정밀초음파 전문의에게 진단을 받아볼 것을 권했다.
2014년 4월 10일, 남편은 일을 해야 해서 나는 친정 엄마와 함께 전문의를 찾아가 정밀 초음파 검사를 받았다.
원래 그 날 남편과 나는 주변 친구들에게 임신소식을 공표하려고 했으나, 먼저 검사를 받고 아기가 건강한 지 확신하고 싶었다.
정밀 초음파 검사를 실시한 의사는 초음파 사진 한 장을 출력하여 건네주며 말했다.
"문제가 있습니다." 순간, 아기를 잃었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하지만 조금 전만 하더라도 뱃속에서 아기가
힘차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그저 머리 속이 복잡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아기를 낙태시킨다는 의사의 말에 나는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이때 친정 엄마는 의사의 말을 끊으며, 딸은 예정일까지 생명을 지킬 거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머리 속이 온통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아기가 곧 우리 곁을 떠난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혼자 병원을 나선 후 남편이 근무하는 사무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 좀 하자고 했다. 어쩌면 당시 내 목소리가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댄은 사무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품으로 달려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한 손으로는 초음파 사진을 꼭 쥔 채로. 그리고 그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 놓았다.
우리는 서로를 꼬옥 껴안은 채 함께 눈물을 흘리며 초음파 사진을 바라보았다. 우리 눈에는 건강하게만 보이는 아기였다.
결혼 4주년 기념일을 이틀 앞둔 그 날, 우리는 생에서 가장 끔찍한 소식을 접하고 말았다. 댄과 나는 잠시 집을 떠나 마음을 진정하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우리는 주변 사람들이 임신소식을 알도록 블로그에 포스팅했다. 아기가 무뇌증을 갖고 있으니 아기를 무사히 잉태할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는 글도 덧붙였다.
출산 예정일이 다가올수록 병원을 찾아가는 일이 잦아졌는데, 매번 병원 방문 시 가슴이 찢어지듯 슬펐다. 하지만 배 속의 아기는 강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2014년 5월 23일, 아기의 성별을 알고자 병원을 찾았다. 그리고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을 초대하여 젠더리빌파티(gender reveal party: 아기 성별 확인 파티. 병원에서 태아의 성별이 적힌 종이를 봉투에 넣어 주면 부모는 그것을 열어보지 않고 일반적으로 베이커리에 맡긴다. 그러면 베이커가 남아면 케이크 속을 파란색으로, 여아이면 분홍색으로 채워 완성하고 부모는 케이크를 잘랐을 때 비로소 태아성별을 확인할 수 있다 - 역주)를 열었다. 동생들이 직접 만든 케이크를 잘랐을 때, 우리는 뱃속의 아기가 남자아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의 이름을 셰인 마이클 헤일리라고 지었다. 우리는 셋이 함께 추억을 만들고 싶은 장소를 선정해 버킷 리스트를 작성했다. 댄은 페이스북 계정을 개설하여 가족과 친구들이 우리의 모험을 팔로우할 수 있도록 했다. 우리는 케이프 메이 동물원(Cape May Zoo), 메리랜드 오션시티(Ocean City Maryland), 지노스 치즈 스테이크(Geno's Cheese steaks), 뉴욕 시티, 스프루스 스트리트의 하버 파크(Spruce Street Harbor Park) 등을 여행했고 야구 경기도 관람했으며 심지어 기차를 타고 랭커스터(Lancaster) 여행도 했다. 이러한 모험은, 우리에게 엄마와 아빠라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이름을 선사해 준 아들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모든 추억을 사진으로 남겼고 이를 페이스북에 포스팅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역 뉴스국에서 작가로 활동하는 친구 첼시가 우리 여행 스토리를 기사화해도 되는지 물어 보았고 우리는 이에 흔쾌히 동의했다. 그렇게 필라델피아 NBC10 방송은 자사 페이스북에 우리 스토리를 포스팅했고, 머지않아 수 많은 사람들이 우리 모험을 팔로우하기 시작했다. 그 후 우리는 여러 방송 인터뷰를 했는데 그 중 한 인터뷰는 필라델피아 6ABC 뉴스의 황금 시간대에 방영되기도 했다.
우리는 셰인의 사연을 공유하고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사람들의 글을 읽으며 위안을 받았다.
셰인과 함께 하는 버킷 리스트를 막 시작했을 때 페이스북 팔로우는 몇 백 명 정도였다. 몇 달 후 버킷 리스트를 마쳤을 때 페이스북 팔로우 수는 955.000명에 다다랐다.
셰인이 전 세계에 걸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남긴 자취를 바라보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 후 병원을 다시 찾았을 때 양수수치가 정상수치보다 2주나 앞서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양수과다증(polyhydramnios)이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무뇌증 아기는 삼키는 반사가 없기 때문에 생기는 흔한 증상 중 하나였다.
이 상태에서 양수수치가 더 상승하면 출산 위험이 커지므로 우리는 임신 39주에 분만유도를 하도록 결정했다.
셰인이 세상의 빛을 바라보기 전 마지막 일요일, 우리는 가족들과 함께 셰인의 39주를 기념했다. 39주 동안 아들을 품은 우리는 하나의 가족이 되어 그 많은 모험을 함께 했다. 평생 지속될 기억과 추억을 만들어 냈다. 그야말로 기적과도 같은 여정들을 이루어냈다.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지구에서 함께 숨쉬지 못할 아이의 부모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배우게 되었다. 우리는 하나의 가족이 되어 매 순간 함께 기뻐하고 축하했다. 우리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하나님의 듯을 순순히 받아들이겠다고 기도했다. 10월 7일, 예정된 유도분만을 위해 우리는 병원에 도착했다. 산부인과 의사 세 명이 내겐 한없이 길고 고되게 느껴진 분만을 도와 주었다. 분만실 밖으로는 우리의 가족과 친지 23명이 대기실에 앉아 침착하게 기다렸다.
10월 9일 새벽 2시 25분, 진통 15분 만에 셰인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셰인은 완벽했다!
몸무게 6 파운드 9온스, 키 19인치의 자그마한 체격이었다.
셰인의 눈과 우리가 마주쳤을 때 순간의 경험은 그 어떤 경험과 견줄 수 없이 고귀했다. 마침내 아이의 작고 앙증맞은 얼굴을 보았을 때 나는 행복의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초음파 사진에서 본 그대로 입술과 코가 아빠를 쏙 빼 닮았다. 그리고 엄마를 닮아 머리 숱이 풍성했다. 간호사와 의사들은 목사님과 가족들 그리고 사진사 2명 모두를 분만실 안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셰인은 천주교 세례를 받았고, 그 곳에 있던 모든 이들이 세례 증인이 되어 주었다. 댄과 나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고 가족들은 침대 옆으로 다가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셰인이 딱 한번 울음을 터트린 적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사진 기사가 우리에게 아이를 좀 더 올려 달라고 부탁했을 때였다. 그때 셰인의 아름다운 울음소리 또한 비디오에 담을 수 있어 얼마나 감사한 지 모른다.
아이는 두 눈을 뜬 채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탄생을 축하하는 가족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렇게 약 1시간 반이 지난 후 우리 부부가 아이와 조용히 있을 수 있도록 다들 자리를 떠나 주었다. 우리는 아이를 품에 안고 원없이 쓰다듬고 말을 건네며 후회없이 아이를 사랑했다. 그리고 2시간 후인 오전 6시 5분, 셰인은 내 품에서 평온하게 눈을 감았다.
우리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을 불러 아기 천사의 작별 소식을 전했다. 셰인의 고모와 삼촌,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촌들, 그리고 친구들은 차례대로 방에 들어와 눈을 감은 셰인을 한번씩 안아 보았다. 셰인의 체온이 금새 식지 않도록 아이를 꼬옥 껴안아 보았다.
댄과 나는 총 36시간 동안 셰인을 품에 안을 수 있었다. 아이 목욕을 시키고 즐겨 들려주었던 동화책을 읽어주고 함께 기도 하고 생일 축하 노래도 불러주었다.
이 36시간은 우리 인생에 있어 가장 고통스러우면서도 놀랍고 고귀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병원 장례사에게 셰인을 넘겨주는 과정은 오늘날까지도 가슴을 찌를 정도로 고통스럽고 슬펐다.
우리는 텅 빈 손과 갈기갈기 찢어진 마음을 안고 병원을 떠났다. 가슴에 난 상처는 결코 그 무엇으로든 채워지지 깊고 깊은 슬픔이었다.
셰인의 장례식을 앞두고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방문했다. 친구와 가족들은 우리가 힘들고 고된 시간을 꿋꿋이 헤쳐나갈 수 있도록 정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장례식 전 날 우리가 조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착용할 녹색 리본을 만드는 것을 도와주었고, 셰인의 사촌과 삼촌들은 장례식 때 착용할 손목밴드를 제작하기도 했다. 장례 미사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오른편에 놓인 셰인의 관을 바라볼 때마다 비탄이 밀려왔다. 이 날 우리는 셰인의 팔로우 한 명을 만났다. 조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우리에게 선물을 건네 주기 장례식을 찾아온 것이다. 셰인 빅토리노란 이름을 가진 그는 셰인 이름이 등에 새겨진 셔츠 한 장을 전달해주기도 했다.
우리는 공동묘지에 마련된 ‘천사 구역’에 셰인을 묻었다. 이곳에서 셰인은 너무도 빨리 하늘나라로 돌아간 또 다른 아기 천사들과 함께 쉬고 있다. 우리는 일주일에 수 차례 셰인을 찾아갔고, 아직까지도 우리는 아기가 좋아하던 동화책을 낭독해 주곤 한다. 그렇게 우리는 셰인을 잊지 않고 늘 사랑하고 그리워한다는 점을 상기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들이 더더욱 그립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시간이 모든 상처를 고쳐줄거라고. 하지만 시간은 우리의 상처를 고쳐주지 못한다. 우리는 셰인이 일궈낸 발자취가 너무나도 자랑스럽다. 비록 지구에 머문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지만, 몇 세대를 거쳐 지속될 자취와 영향을 남기고 떠난 아들이 참으로 자랑스럽다. 아들아, 너는 이 세상을 하나로 만들었고 모든 생명이 가치있으며 보호받고 존경받아야 함을 증명했단다.
우리 스토리를 팔로우하고 셰인과 우리 가족을 위해 기도해주신 수 많은 분들께 감사드린다. 삶의 증인이 되어 준 친구들과 가족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이다.
우리 천사 셰인 마이클 헤일리를 그리며.
엄마 아빠는 너를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한다.
마지막 업데이트: 2021.01.27